- '대발이 아버지'부터 '야동 순재'까지...최고령 현역 배우, 마지막까지 무대 지켰다
- "오래 살다보니 이런 날도"...역대 최고령 KBS 연기대상 수상 4개월 만의 비보
참고사진 = 에스지 연기 아카데미 홈페이지
원로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1세.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한 고인은 1956년 연극 무대에 오른 이후 70여 년간 한국 연기사의 산 증인으로 활동해왔다. 대한민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첫 페이지부터 함께한 진정한 국민 배우가 영면에 들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1960년 실험극장을 만들어 연극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57년 방송한 한국 최초의 TV 방송 프로그램 HLKA에 출연했고 1961년 KBS에서 본격적인 탤런트 생활을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초창기 드라마란 무대에서 하던 연극을 TV 전파라는 신문물에 실어 내보낸다는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 드라마에서는 NG가 나도 그냥 밀어붙였다고 한다. 프롬프터도 따로 없던 시절이라 대본 든 스태프가 밀고 들어오고, 카메라의 줌인 기능이 없다보니 배우한테 들이밀다 부딪히는 장면이 그대로 나가는 등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열악한 광경이었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면서 한국 방송 역사의 개척자가 됐다. 이후 주요 출연 드라마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에 달하며,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대표작 중 하나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는 시청률 65%를 기록했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표상이었던 캐릭터 '대발이 아버지'로 당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감을 이끌어냈다. "대발아~"라는 유행어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한국 사회 아버지상의 상징이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연기자로서 이순재의 위치는 건재했다. 2001년~2002년 출연한 상도와 내 사랑 누굴까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야인시대에 원노인 역으로 출연해 강한 존재감을 남겼다.
70대에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는 특유의 근엄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 연기로 큰 사랑을 받으며 '야동 순재' 캐릭터로 어린 팬층까지 형성했다. 2006년의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우연히 본 야동에 빠져 가족 몰래 보던 것이 들켜 빈축을 사게 된 일명 '야동 순재' 캐릭터로 인해 젊은 층에 친숙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이순재는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 공동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커리어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순재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연극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리어왕'에서는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찬사를 받았다. 제자 배우 유연석은 "제 은사님이시다. 선생님이 '리어왕' 대사를 아흔이라는 나이에 무대에서 하시는 걸 보고 정말 감동적이었다"며 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낸 바 있다.
고인은 한평생을 연기에 바쳐왔지만, 제14대 국회의원(민주자유당)을 지내는 등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기도 했다. 1970~80년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으며, 1992년 14대 총선에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도 역임했다.
60년이 넘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발전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최근까지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로 후배 배우들을 지도하며 연기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지난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마지막 연기 혼을 불태웠다. 이순재는 지난 11일 밤 열린 2024 KBS 연기대상에서 KBS 2TV 드라마 개소리로 대상을 받았다. KBS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다. 이순재는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KBS가 대한민국 방송 역사를 시작한 해가 1961년으로 많은 작품과 연이 닿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늘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이 아름다운 상, 귀한 상을 받게 됐다"고 운을 뗐다.
주요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아왔던 이순재는 상에 대한 소신도 밝혔다. 그는 "(미국 아카데미는) 60세 먹어도 잘하면 상을 준다"라며 "공로상이 아닌,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가천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제자들에 대한 고마움도 표현했다. 그는 "학생들 한 명 한 명 다 지도한다"면서 "작품을 정해서 한 학기 동안 연습해 기말에 발표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맞더라. 학생들한테 '정말 미안하다. 난 교수 자격이 없다'고 했다. 학생들이 '염려 마십시오. 가르쳐 주신 대로 만들어내겠다'고 하는데 눈물이 나왔다. 그 학생들을 믿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오늘의 결과가 온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수상 소감에서 고인은 "시청자 여러분, 정말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겨 깊은 여운을 남겼다. 1970년 TBC 연기대상에서 첫 대상을 거머쥔 그는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연기의 정수를 보여주며,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고령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건강 악화로 알려진 고인은 최근 몇 년간 건강 이상설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실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재활 치료에 전념해왔다. 동료 배우 박근형은 지난 8월 "이순재 선생님을 여러 번 찾아뵈려 했는데 꺼리셔서 가뵙지 못했다"며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얘기를 듣고 있는데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순재는 2008년 모친상을 당한 뒤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 "관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공연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고인의 배우로서의 책임감과 프로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기억된다. 보통 이순재 정도 되는 원로배우는 촬영 시간을 앞당겨 주는 것이 관례인데도 다른 배우들이 자신 때문에 촬영 시간이 늦춰지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야인시대 김두한과 태조 왕건 궁예로 유명한 배우 김영철은 당시까지만 해도 촬영장에서 제작진들을 갈구며 가장 먼저 촬영하게끔 하는 촬영장의 호랑이로 유명했는데, 본인보다 한참 선배인 이순재의 이러한 마인드를 보고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참고사진 = 에스지 연기 아카데미 홈페이지
고인의 별세 소식에 연예계는 깊은 애도에 잠겼다. MBC TV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고인의 사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정보석은 25일 소셜미디어(SNS)에 "선생님,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연기도, 삶도, 배우로서의 자세도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며 고인을 회상했다. 정보석은 "제 인생의 참 스승이신 선생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 방송 연기에 있어서 시작이고 역사였다"고 추모했다.
모델 겸 배우 배정남은 인스타그램에 "이순재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으며 "너무나도 존경하는 선생님과 드라마를 함께할 수 있어서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라고 전했다. 배우 한지일은 SNS에서 고인을 "대한민국 영화·방송·연극계의 큰 형님"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선배님은 후배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베푸셨던 분"이라며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적었다.
배우 박은혜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시청자 입장으로도 작품 안에서 온 국민에게 희망도 주시고 즐거움도 주셨던 선생님께 저희 모두가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라며 "편히 쉬세요. 감사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가수 테이는 이날 MBC FM4U '굿모닝FM 테이입니다'에서 청취자로부터 이순재의 별세 소식을 듣고 "선생님께서 본인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대나 카메라 앞에 있겠다고 하셔서 100세 넘게 정정하게 활동하실 줄 알았다"며 "한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으셨던, 열정을 다하셨던 모습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코미디언 김영철도 SBS 파워FM '김영철의 파워FM'을 통해 "마치 친정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이라며 "연예계에서도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던 분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가수 겸 배우 하리수는 이순재의 사진을 올리면서 "이순재 선배님, 그동안 정말 많은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으셨던 모습은 모든 후배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의 깊은 연기와 따뜻한 미소, 그리고 배우로서의 진정성을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하늘에서도 편안히 쉬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가수 태연은 과거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에 출연했던 이순재 및 소녀시대 동료 멤버 유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그룹 'AOA' 출신 권민아는 "오래 전이지만 촬영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연기에 대한 칭찬도 해주시고, 저를 귀엽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했다"며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셔서 많은 걸 배우고, 느끼고, 그때의 저에게는 더 열심히 한 계기가 돼 주셨다"고 애통해했다.
정치권에서도 추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큰 별, 이순재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고 썼다. 이 대통령은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은 예술인이자 국민배우였던 선생님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며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부디 평안히 쉬십시오"라고 했다.
누리꾼들도 각종 SNS를 통해 "학창시절 '하이킥'을 보고 자랐는데 선생님이 별세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배우님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많이 그리울 것 같다" "별세 소식에 비가 내리나 봅니다" "좋은 연기를 많이 봐서 즐거웠다"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인이 등장한 유튜브 영상에는 추모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매회 수백 만회를 기록하는 '거침없이 하이킥' 클립 영상 댓글에서는 "청춘을 함께해 준 분", "어제도 웃으면서 봤는데 이제 슬프게 볼 것 같다", "우리들의 영원한 할아버지,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이순재는 명문 서울고등학교-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한 당시로는 초엘리트 출신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대중예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하위 중에서도 최하위 인식을 갖고 있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재 같은 엘리트 출신들의 연예계 참여는 사회 전반에 연예인이라는 직업 인식을 상승 시키는데 굉장한 영향을 미쳤고 실제로 배우 윤여정이 배우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이순재 같은 당시 초엘리트도 하는 일이니 결코 창피한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방송사 시험을 봤다고 한다.
90대의 고령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뛰어난 암기력, 해박한 지식인의 소양에서 나오는 깊이 있는 작품 분석력, 정확한 한국어 구사에서 나오는 대사 전달력, 허스키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시원한 발성은 대배우 이순재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장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희정 씨와 아들 이종혁, 딸 이정은 씨가 있다. 고인이 보여준 배우로서의 책임감과 열정, 그리고 후배들을 향한 아낌없는 사랑은 한국 연예계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3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2025년 서울에서 눈을 감기까지, 91년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으며, 70년의 연기 인생은 한국 대중문화사의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라는 마지막 대상 수상 소감처럼, 고인은 끝까지 겸손하고 담담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연기와 정신은 결코 담담하지 않다. 그것은 찬란하고, 위대하고, 영원할 것이다.







